못가의 꿩은 열 걸음 걸어서 [겨우] 한 입 쪼아먹고, 백 걸음 걸어서 한 모금 마시지만, 새장 속에서 길러지기를 바라지 않는다. [새장 속에서는 먹이가 충분하여] 기력은 황성하겠지만 속이 편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장자』, 안동림 옮김(현암사), 92-93쪽)
새장속의 새는 따뜻하고 시원한 실내에서 충분한 먹이를 먹고, 잠시의 재롱으로 우쭈쭈와 충분한 먹이를 보장받는다. 하지만 못가의 꿩은 먹을 것이 귀하다. 겨울에는 추위까지 견뎌야 한다. 그럼에도 새장을 거부한다. 장자는 그 이유를 속이 편하지 못해서라고 했는데, 달리 말해 자유가 없어서 이다. 자유란 무엇인가, 무엇이길래 생존의 위협을 무릅쓰더라도 지키려 한단 말인가?
自(스스로 자), 由(말미암을 유). 말미암다는 말은, 현상과 사물의 원인과 이유가 되는 것을 말하는 데, 그 원인과 이유가, 바로 나 스스로일때를 자유라고 한다. 일하고 공부하고 사람을 만나고…… 모든 사물과 행위의 원인과 이유가, 내가 되는 상태라는 것은 얼핏 경쾌하고 가볍고 즐겁게 느껴진다.
반면 실존주의 철학자들은 ‘자유를 선고 받았다’라고 말했다. '선고'란, 법정에서 재판장이 판결 내림을 뜻한다. 다시말해 자유에는 거부할 수 없는 무게의 책임과 의무가 수반됨을 명징하게 표현한 것이다. 새파란 창공을 가르고, 어화둥둥 어여쁜 나만의 짝을 구하고, 변화무쌍한 사계절을 만끽하고, 내 손으로 내 삶을 꾸릴 자급자족의 기쁨을 누리기 위해서는 저 멀리서 나를 노리는 적을 경계해야하고, 짝짓기 경쟁에서 이겨야 하고, 열 걸음 백걸음을 걷더라고 먹이와 물은 찾아나서야 한다.
나는 자유로운 인간인가를 스스로에게 질문해 본다. 물론 누구에게 의지하지 않고 생계를 꾸린다. 삶에서 당면하는 문제들은 그때그때 스스로 해결하는 편이다. 그것까지는 매우 좋은 일이다.
하지만 최근 이반 일리치의 책들을 읽으면서 과연 내가 자유로운 인간인가에 대해 한 발 더 나간 질문을 던지고 있다. 이반 일리치의 책 『젠더』에는 르네 지라르의 ‘욕망의 삼각형 구조‘에 대한 언급이 있다.
아래 그림에서 처럼 나의 욕망1은 나로 말미암은 것이지만 욕망2는 타자가 개입된 왜곡된 욕망이다. 그 타자란 친구나 이웃일 수도 있고 수도, 정교하게 기획된 마케팅의 결과물들일 때도 있다.
왜곡되 욕망을 좇아다니면 진짜 나를 잃어버리게 된다. 나의 시간과 노동은 모두 왜곡된 욕망의 제물로 바쳐지고 ’일생은 말 달리듯 지나가 버려 막을 도리가 없다.‘ (『장자』, 안동림 옮김(현암사), 55쪽) 왜곡된 욕망도 나의 삶을 위태롭게 한다. 자유가 없다면 목숨이 붙어있다한들 진짜 나를 빼앗기고,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니다.
내 앞의 물건들과 나의 행동을 살핀다. 천천히 나를 찾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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