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 대학생 시절 종로 거리를 걷다가 ‘도를 아십니까?’라고 물어보는 사람들을 따라간 적이 있었다. 그 때 나는 ‘도’가 궁금했나 보다. 하얀 소복으로 갈아입고 절을 몇 번 한 것 외에, 별다른 기억이 없는 것을 보니, 그들은 내게 ‘도’를 못 알려준 모양이다. 요즘도 거리에서 종종 그들을 만난다. 여전히 내게 도를 가르쳐 주고 싶어 한다. 대답대신 빠른 걸음으로써, 매번 ‘도’를 걷어차 버린다.
큰 맘 먹고 시작한 글쓰기학교. 맙소사, 이번엔 [장자]가 내게 ‘도’를 알려주려 한다. 모호한 비유와 상징, 난해한 어법, 처음보는 한자가 가득하다. 무엇보다 ‘참된 도는 명칭으로 나타낼 수가 없다. (중략) 도는 뚜렷이 나타나면 참된 도가 아니다. (중략) 최고의 지식은 알지 못하는데 머물러 있어야 한다(p.73)‘ 라는 말이 장자의 철학을 배우고자 하는 나를 당혹스럽게 한다.
그럼에도 ’참된 도는 어디에나 있다(p58)’라는 수수께끼 같은 문장 하나가 계속 뇌리에서 맴돈다. 정말 말로 표현도 안 되고, 뚜렷이 나타낼 수도 없다는 그 어려운 ‘도’가 어디에나 있을까?
[장자]를 공부하는 중, 내가 만난 최애 캐릭터는 포정(包丁)이다. 포정은 나와 같은 보통의 생활인이고 직업인이라 더욱 친근하게 느껴졌다. 包는 부엌, 丁은 부역에 종사하는 낮은 신분을 의미하는데, 해우(解牛, 소 발골작업)한다고 하는 것을 보면, 요리사라기보다는 소, 개, 돼지를 잡는 백정의 다른 이름이다. 미천한 신분임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런 포정이 최고권력자 문혜군 앞에서 소를 해우하는 퍼포먼스를 시연한다. 포정이 해우하는 장면은 마치 춤을 추듯 리드미컬하고, 악기를 연주하듯 박자가 딱딱 맞는다. 무엇보다 해우에 쓰고 있는 그 칼은 20년 가까이 사용했음에도 휘거나 부러지기는커녕, 방금 숫돌에 갈아 나온 듯하다. 절묘한 포정의 솜씨를 보고 문혜군이 칭찬하니, 포정이 자신의 행위가 ‘기술’이 아닌, ‘도(道)’라고 한다.
포정이 문혜군을 위해 소를 잡은 일이 있다. 손을 대고, 어깨를 기울이고, 발로 짓누르고, 무릎을 구부리는 동작에 따라 서걱서걱, 빠극빠극 소리를 내고, 칼이 움직이는 대로 싹둑싹둑 울렸다. 그 소리는 모두 음률에 맞고, 상림의 무악에도 조화되며, 또 경수의 음절에도 맞았다.
문혜군은 [그것을 보고 아주 감탄하며] ‘아, 훌륭하구나. 기술도 어찌하면 이런 경지에까지 이를 수가 있느냐?’라고 말했다. 포정은 칼을 놓고 말했다. ‘제가 반기는 것은 도입니다. 기술 따위보다야 우월한 것입죠.(『장자』, 안동림 옮김(현암사), 92-93쪽)
나는 이 포정의 기와 도의 관계가 매우 흥미롭게 보인다. 내가 보기엔 기술처럼 여겨지는데, 왜 포정은 ‘도’를 말했을까? 포정이 말하는 도란 과연 무엇일까?
물화(物化) : 모든 사물은 다 같이 하나다
포정은 해우하는 동안 칼로 소의 뼈와 살을 자르지(折, 割) 않는다. 포정의 칼은 소의 가죽과 고기의 틈새, 살과 뼈 틈새를 치고(批) 벌려 원래 그 모양(固然)대로 가를(導) 뿐이다. 그렇기에 수천마리의 소를 해우하고도 칼이 그대로 보존될 수 있었다.
대체 포정은 무슨 수로 눈에 보이지도 않는 소가죽과 살의 틈새, 뼈와 살의 틈새를 갈라 해우할 수 있었을까? 포정은 해우할 때 ‘눈이 아닌 정신으로 소를 만난다(神遇,p93)' 라고 했는데 정신으로 만난다’라는 것은 대체 무엇일까? 해답은 바로 장자의 또 다른 주제인 물화를 통해 살펴볼 수 있다.
사물은 저것 아닌 것이 없고, 또 이것 아닌 것도 없다(p59).
장주가 나비이고 나비가 장주인 경지... 이러한 변화를 물화(物化)라고 한다(p87)
물화란 대상(사물, 사람)과 내가 구분과 경계를 없이 하나가 되는 것이다. 그렇다. 장주가 나비가 된 것처럼 포정 자신이 칼이 된 것이다. 인간 감각으로는 한계가 있으니, 그 자신이 직접 칼이 되어(물화) 보이지 않는 틈새를 파고 들어간 것이다.
설거지 할 때, 나는 세제 묻은 수세미가 되어 뽀득뽀득 그릇을 닦는다. 밥을 먹을 때, 이와 혀가 되어 음식의 질감과 맛을 느낀다. 운전할 때, 나는 자동차와 도로가 되어 시원하게 달린다. 북한산에선 등산화가 되어 암릉을 오른다. 글을 쓸 때, 펜이 되어 종이를 채워나간다. 샤워 땐, 따뜻한 물줄기가 되어 개운하게 씻어낸다. 생각해 보면 많은 물화들이 나의 삶에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
특히나 중요하거나 어려운 문제에 봉착했을 땐, 초집중하여 물화 한다. 학업에 물화했기에 진학할 수 있었다. 진정한 친구란 나와 물화 된 사람이다. 생업에 물화했기에 무리 없이 생활을 이어나간다.
이에 반해, 내가 겪는 갖가지 문제들은, 대체로 물화하지 못하는 데서 생겨난다. 물화하지 못한다는건, 나와 너의 경계를 해체하지 못했다는 뜻이다. 나를 고집만 한다면, 어떤 문제나 관계도 해결할 수 없다. 기존의 세계관으로 중무장하고 바뀌지 않고 버티기만 한다면, 세상만사의 변화무쌍에 조화로운 대응을 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맞다. 이미 나도 포정처럼 물화를 통해 삶의 문제를 해결해 내고 있었다. 또한 나는 어떤 면에서는 곳곳에서 스스로를 경계짓고 있었다.
남산강학원에 첫발을 내 디딘지 이제 2달이 되었다. 학원은 학원인데, 내가 전에 알던 ‘학원’과는 무척이나 생경한 풍경과 시스템이었다. 이곳에서는 밥도 주지만, 밥을 해야 하고, 청소와 설거지도 하고, 의자 대신 벽에 기대 앉아 강의를 듣는다. 그러나 처음의 낯섦과 이질을 죽이고, 나는 점점 남산강학원과 물화하며, 학원 이곳저곳을 맘껏 누비는 중이다.
또, 장자와도 물화 중이다. 예습과 본 강의, 미자쌤이 올려주시는 녹음파일을 다시 듣고, 글을 쓰고, 피드백을 받고, 다른 글을 찾아 읽으면서 말이다.
(장자와 물화를 완성해, 어느 페이지를 펼치더라도 어렵다, 모르겠다는 말이 안 나오는, 술술 이해되는 경지를 이루고 싶다. 튜터쌤의 강의를 듣고 바로바로 이해하고 싶다. 글을 겨우겨우 짜내는 것이 아니라, 수도꼭지에서 콸콸 물 쏟아지듯, 장자 글을 쓰고 싶다. 부딪힘 없이 장자세계를 유영하고 싶다.)
음식의 영양분이 물화되어 인간의 몸이 된다. 인간은 공부라는 과정을 통해 지혜로 물화된다. 인간 DNA중 50%만이 고유의 것이고, 나머지 50%는 외부의 바이러스, 박테리아 등이 물화된 것이다. 약 20억년 전에 어느 숙주가 외부의 미토콘드리아를 물화했기에, 진액세포가 나타났고, 지금의 동식물이 존재하게 되었다.
그렇다. 물화는 생명의 본질이고 생명 그 자체다. 물화를 통해 생명이 끝없이 연결된다. 물화의 단절은 죽음이자 반(反)생명이다.
참된 도는 어디에나 있다
내가 포정을 각별히 사랑하는 이유는, 도라는 것이 고상한 정신 수양, 또는 두꺼운 책 속, 혹은 극한의 상황에서나 깨달을 수 있는 것이 아니란 것을 알려주기 때문이다. 포정은 평범한 얼굴을 하고 친근하게 다가와 일상에서 샅샅이 도를 찾을 수 있도록 나를 도왔다. 포정이 바로 신인, 지인, 진인, 성인, 인기지리무신, 옹앙대영, 애태타이며, 동시에 나를 비추는 맑디맑은 거울이다.
모든 사물은 다 같이 하나다...도에 다다른 자만이 다 같이 하나임을 깨달아... 스스로 본분을 다하고...충분히 자기 삶을 즐길 수 있으면 도에 가깝다.(p63)
포정은 물화를 통해 자신 앞에 놓인 삶의 문제를 해결해 내었고, 그 삶을 만족(滿志, p95) 하였다. 이처럼 물화를 통해 나와 만나는 세계와 하나 되고, 스스로 할 일(본분)을 다 하고, 또 그 삶을 즐기는 것이 바로 도이다.
장자의 말이 맞다. 참된 도는 어디에나 있다.
더불어 물화라는 생명의 원리를 깨우칠 수 있어서 참 기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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