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

[장자][양생주] 정신으로 대하고 생긴 그대로 따라간다

태루럽 2024. 6. 30. 07:58
문혜군은 [그것을 보고 아주 감탄하며] “아, 훌륭하구나. 기술도 어찌하면 이런 경지에까지 이를 수가 있느나?”라고 말했다. 포정은 칼을 놓고 말했다. “제가 반기는 것은 도입니다. [손끝의] 재주(기술) 따위보다야 우월한 것입죠. 처음 소를 잡을 때는 눈에 보이는 것이란 모두 소뿐이었으나(소만 보여 손을 댈 수 없었으나) 3년이 지나자 이미 소의 온 모습은 눈에 안 띄게 되었습니다. 요즘 저는 정신으로 소를 대하고 있고 눈으로 보지는 않습죠. 눈의 작용이 멎으니 정신의 자연스런 작용만 남습니라. 천리(자연스런 본래의 줄기)를 따라 [소 가죽과 고기, 살과 뼈 사이의] 커다란 틈새와 빈 곳에 칼을 놀리고 움직여 소 몸이 생긴 그대로를 따라갑니다. 그 기술의 미묘함은 아직 한 번도 [칼질의 실수로] 살이나 뼈를 다친 일이 없습니다. 하물며 큰 뼈야 더 말할 나위 있겠습니까?…… 하지만 근육과 뼈가 엉긴 곳에 이를 때마다, 저는 그 일의 어려움을 알아채고 두려움을 지닌 채, [충분히] 경졔하여 눈길을 거기 모으로 천천히 손을 움직여서 칼의 움직임을 아주 미묘하게 합니다. 살이 뼈에서 털썩하고 떨어지는 소리가 마치 흙덩이가 땅에 떨어지는 것 같습니다. 칼을 든 채 일어나서 둘레를 살표보며 [떠나기 실어] 잠시 머뭇거리다가 마음이 흐뭇해지면 칼을 씻어 챙겨 넣습니다. 문혜군은 말했다. “훌륭하구나. 나는 포정의 말을 듣고 양생의 도(참된 삶을 누리는 방법)을 터득했다” (『장자』, 안동림 옮김(현암사), 93-96쪽)



위 내용은 천한 신분의 포정이 권력자 문혜군 앞에서 당당하게 도를 말하며, 해우하는 법을 설명하는 것이다. 처음엔 큰 덩어리의 완전한 소만 보이니 손을 댈 수 조차 없었다고 하고, 3년이 지나자 큰 덩어리는 보이지 않게 되고 앞다리, 머리, 뒷다리, 몸통 등등이 구분되어 보이기 시작했다고 한다. 수 십년이 지난 지금은, 눈이 아닌 정신으로 소를 대하니 소 가죽과 고기 사이에 칼을 넣어 분리하고, 살과 뼈사이에 칼은 넣어 분리한다. 소의 몸이 생긴 그대로를 따라가는 것이 그 비결이다.

처음 이 우화를 접했을 때 나는  tv에 나오던 생활의 달인을 떠올렸다. 만두의 달인, 김밥말기의 달인 등등 그들은 마치 안보고도 할 수 있을 듯이 온 몸의 감각기관을 총동원해서 능숙하게 현란하게 그들의 작업을 수행해 나갔다. 하지만 그들의 ‘달인(達人)’이라고 하지 ‘도인(道人)’이라고 하지은 않는다. 특히 포정은 자신의 해우행위가 도이지, 손끝의 재주(기술)이 아니라고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도의 이유는 친절하게 설명하는 포정.
*정신으로 소를 대하고 눈으로 보지는 않습니다.
*눈의 작용이 멎으니 정신의 자연스런 작용만 남습니다.
*천리(자연스런 본래의 줄기)를 따라 커다란 틈새와 빈 곳에 칼을 놀리고 움직여 소 몸이 생긴 그대로를 따라갑니다.

이 장면에서 소의 온 몸을 미끄러지듯 훝고 지나가는 포정이 떠오른다. 포정은 해우하는 과정에 자신이 칼이 되고, 그 칼은 다시 소의 몸이 되었다. 포정, 칼, 대상인 소 모두 하나가 된 물화의 상태를 이룬 것이다. 천리를 따른 다는 것은 사물의 생긴 그대로를 인정하고 그것과 부딪힘이 없을 때이다. 다툼도 없고 미움도 없으며 물러날 때와 나아갈 때를 정확히 아는 것이다.

글을 쓴다는 것도 포정이 해우하듯 가능한 경지가 있다. 나는 아직 소 전체가 보여 손을 대지 못하는 경우가 있어 답답하고 막막한 순간들이 있다. 텍스트를 읽고 생각하고 읽고 정리하고 한 걸음, 한 걸음 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