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약: 인도의 바이쉐시까 학파의 세계를 나누는 6범주
실체: 지, 수, 화, 풍/ 허공, 시간, 공간, 아, 의 9가지
속성: 하얀 등 형용사
운동: 뛴다 등 동사
보편: 개의 보편성(비숑, 말티즈, 리트리버, 불독…)
특수: 개의 특수성( 고양이, 말, 소…)
내속: 실체, 속성, 운동, 보편, 특수가 결합한 상태
여기서는 용수가 설일체유부의 이론을 비롯하여 실재론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비판하고 있는지 살펴보기로 한다. 먼저 원래부터 ‘실재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어떤 것이 실재하는가에 대해 먼저 확인해 두기로 한다. 다만 기원후 2~3세기경 용수가 비판의 대상으로 삼은 인도의 실재론에 대한 상세한 내용들은 그렇게 명확하지 않다.
그러므로 실재론과 용수의 ‘공사상’에 어떤 대립점이 있는지를 명확하게 하기 위해 후대의 바이쉐시까 학파나 설일체유부의 개론서에 보이는 정비된 이론체계에 기반하여 그들의 사상을 시술하는 것은 가급적 피하기로 한다.
1) 인도의 실재론
지금 하얀 개가 눈앞을 뛰어다니고 있다고 하자.
인도의 대표적인 실재론자인 바이쉐시까 학파의 논사들은 ‘하얀 개가 뛰어다닌다’고 하는 바른 판단을 구성하는 모든 요소 ‘하얀’ ‘개‘ ’뛰어다닌다‘에 대응하여 ’하얀색‘이라는 속성, ’개‘하고 하는 실체, ’뛰어다닌다‘고 하는 운동이 인식으로부터 독립하여 실재한다고 생각한다.
더욱이 ’이것은 개다‘라고 판단할 수 있는 ’개다움(견성)‘이라는 보편과 그 보편, 위에서 언급한 속성과 운동을 ’객‘라고 하는 실체에 결합시키는 내속()이라는 관계도 외계에 실재한다고 생각한다. 전문적으로 말하면 정합적인 인식을 구성하는 모든 요소에 대응해서 무엇인가가 반드시 외계에 실재한다고 생각하는 사고방식이다.
바이쉐시까 학파는 실체, 속성, 운동, 보편, 특수, 내속의 여섯가지 범주로 세계를 설명한다.
실체는 지, 수, 화, 풍, / 허공, 시간, 공간, 아, 의의 아홉가지이다.
이 중에 처음 네 가지는 궁극적으로 눈에 보이지 않는영원불변의 원자로 존재한다.
우리가 눈으로 보고 있는 ’개‘ 등은 그 원자들이 집적한 결과로 생긴 실체이자 인식대상으로 실재하는 것이면서 무상한 것이라고 한다.
허공은 공간에 충만해 있고 눈에 보이지 않는 원소로 음성을 전파하는 매개체라고 생각된다.
현대인에겐느 실체라고 생각될 수 없는 시간과 공간도 ’하얀 개가 지금 우리 눈앞을 뛰어다닌다‘고 하는 바른 판단에 시간이나 공간의 표현이 등장하는 이상 그것에 대응하는 시간, 공간이 실체로 존재한다고 생각된다.
아()는 ’나‘라고 하는 관념의 대상이고 지성, 감성, 의사, 윤리적인 덕성 등이 속하는 토대이다.
의()는 사고기관이라고 하며 원자의 크기로 감각기관이 취득한 정보를 순간적으로 나에게 전달하는 실체이다.
속성은 ’하얀‘ ’둥근‘ ’감미로운‘ 등의 형용사로 표시되는 사물의 속성이다.
운동은 동사로 표시되는 행위이다.
바이쉐시까의 교리 체계로 말하면 상승, 하강, 수척, 신장, 진행의 다섯 가지가 있다.
보편과 특수는 개의 경우를 예로 들면 다음과 같다.
’개다움(견성)‘은 많은 종류의 개에 공통하는 것이어서 보편이지만, 같은 동물이라고 해도 고양이의 고양이다움(모성), 소의 소다움(우성)과는 구별되기 때문에 특수가 되기도 한다.
즉 ’개다움(견성)‘은 하위의 보편에 대해서는 보편이지만 동시에 상위의 보편에 대해서는 특수이다.
내속()은 물리적으로 떼어놓을 수 없는 것 사이에 성립하고 실체, 속성, 운동, 보편, 특수가 그것이 속하는 것()과 떨어지지 않고 결합하고 있는 관계이다.
’뛰어다니는 하얀 개‘라는 표현은 ’개‘라고 언어로 표시되는 기체()에 속성이나 운동이 내속하고 있는 것을 의미한다.
이상은 인도 실재론의 구체적인 한 예에 지나지 않지만 실재에 관한 기체적인 사고방식은 인도의 다른 학파나 사상에서도 공유 되었고 인도에서 고도로 발달한 문법학과 관련된 논의와도 연관되어 있다.
예를 들면 ’나는 5년 전에 (A)크게 싸웠는데 지금도 (B) 상처가 아파서 힘들다‘고 하는 문장의 경우 (A)와 (B)의 주어는 동일한 ’나‘이다.
여기에서 5년 전의 나도 지금의 나도 같은 나라는 확신이 생긴다.
대체로 우리는 생각하거나 문장을 쓸 때 ’나‘에게는 불변의 동일성과 자기정체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실재가 된다.
물론 동작도 그 동작의 목적도 그 동작이 행해지는 장소도 실재가 된다.
바로 실재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주어, 동사, 목적어 등을 사용해 자신이 ’바르다‘고 생각하는 문장을 작성할 수 있게 된다.
[근본중송]에서도 운동의 주체이자 주어인 ’걷는자‘와 운동이자 술어, 동사인 ’걷는 행위‘의 관계, 혹은 주어인 ’행위자‘, 동사의 목적어인 ’행위대상‘, 동사인 ’행위‘ 사이의 관계를 논의할 때 마찬가지로 비판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