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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도덕의 계보][필사]저자서문

태루럽 2024. 7. 18. 13:43

1.

우리는 우리 자신을 잘 알지 못한다.
우리 인식하는 자들조차 자신에 대해서는 모르고 있다.
여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 관해서 탐구한 적이 없었던 것이다.
우리가 어느 날 우리 자신을 발견하는 일은 어떻게 일어날 수 있을까?
“네 보물이 있는 그곳에 네 마음도 있느니라”라는 말은 옳은 말이다.
우리의 보물은 우리 인식의 벌통이 있는 곳에 있다.
우리는 날개 달린 동물이자 정신을 수집하는 꿀벌로 태어났기에 항상 그 벌통을 향해 가고 있다.
우리가 진정으로 관심을 두는 것은 오직 한 가지, 즉 무언가를 ‘집으로 가지고 돌아가는‘ 것뿐이다.
그 외의 삶 자체, 이른바 ’체험들‘에 관해서 우리 가운데 누가 진지한 관심만이라도 두고 있는가?
아니 그런 것에 신경을 쓸 시간이라도 갖고 있는가?
우리가 그런 일에 ’몰두했던‘ 적은 아마 한 번도 없지 않았을까?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거기에 두지 않는다.
아니 귀마저도 그것으로 향하지 않는다! 오히려 홀린 듯 자기 자신 속에 깊이 몰입해 있는 사람의 귀에 마침 정오를 알리는 열두 번의 종소리가 세차게 쳤을 때 그 사람이 갑자기 깨어나 “방금 몇 시를 친 거지”라고 자문하는 것처럼, 우리도 때때로 훨씬 나중에서야 귀를 비비고는 무척 놀라고 당황해하면서 “도대체 우리는 방금 무엇을 체험앴지?”하고 묻게 된다.
더 나아가 “우리는 진정 누구인가?”라고 물으면서, 앞서 말한 것처럼 훨씬 나중에 이르러서야 우리의 체험, 우리의 삶, 우리의 존재를 알려주는 열두 번의 진동하는 종소리를 모두 세어 보게 된다.
아아! 그러나 우리는 잘못 세는 것이다.
우리는 필연적으로 우리 자신에게 이방인으로 남는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이해하지 못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오해하고 혼동할 수밖에 없다.
모든 사람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 가장 먼 존재이다”라는 명제는 우리에게 영원히 타당하다.
우리 자신에 대해서 우리는 결코 ’인식하는 자‘가 아닌 것이다


2.

우리가 가진 도덕적 편견의 기원 - 바로 이것이야말로 이 논박서에서 다루는 주제이다 - 에 대한 나의 사상들을 나는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자유정신을 위한 책]이란 제목의 잠언록에서 처음으로 간략하면서도 잠정적으로 개진한 바 있다.
나는 그 책을 소렌토에서 겨울을 나는 동안 집필하기 시작했다.
1876년부터 1877년에 걸친 겨울의 일이었는데, 그때 나는 방랑자가 발걸음을 멈추듯이, 그때까지 나의 정신이 편력해왔던 드넓고 위험한 땅을 조망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그러나 사상들 자체는 전부터 생각하고 있던 것들이었다.
그것들은 이책[도덕의 계보]에 실려 있는 논문들에서 다시 수용하고 있는 사상들과 본질적으로 같다.
부디 이 오랜 중간 시기 동안에 그 사상들이 더욱 원숙해지고, 명확해지고, 강력해지고, 완전한 것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러나 내가 여전히 그 사상들을 고집하고 있다는 사실, 또한 그동안 그 사상들이 더욱더 긴밀하게 결합하여 서로 성장하고 유착되었다는 사실로 인해 나는 다음과 같은 즐거운 확신을 더욱 강하게 갖게 된다.
그러나 확신이란 처음부터 그 사상들이 내 마음속에서 개별적으로 제멋대로 산발적으로 생긴 것이 아니라, 공통된 하나의 뿌리에서, 즉 (내 마음의) 깊은 곳에서 명령하면서, 갈수록 분명하게 말을 걸고, 갈수록 분명한 것을 요구하는 인식의 근본 의지로부터 생겨난 것이라는 확신이다.
왜냐하면 철학자에겐는 오직 그런 것만이 어울리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떤 일도 개별적으로 다룰 수 없다.
우리는 개별적으로 분리된 실수를 저질러서도 안 되고, 개별적으로 분리된 진리를 파악해서도 안 된다.
오히려 한 그루의 나무에서 필연적으로 많은 열매가 맺히듯이, 우리의 사상들, 가치들, 긍정과 부정들 및 가정과 의문들이 우리 내부에서부터 자라나는 것이다.
모두가 서로 친밀하고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으며, 또한 하나의 의지, 하나의 건강, 하나의 토양, 하나의 태양을 증언하고 있다.
이들 우리의 열매가 당신들의 입맛에 맞을는지?
그러나 이것이 나무에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우리에게도, 우리 철학자들에게도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3.

나는 도덕을, 다시 말해 이제까지 지상에서 도덕으로 찬양되어 온 모든 것을 의심한다.
이러한 의심은 나 자신은 원하지 않았는데도 내 삶에서 어쩔 수 없이 너무나 일찍부터 나타났다.
그것은 나의 환경, 시대, 범례, 관습과 너무나 모순되는 것이어서 나에게 ’선천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라고 말해도 될 정도이다.
이러한 의심 때문에 나는 호기심과 의혹에 사로잡혀 때때로 우리가 말하는 선과 악이 진실로 어디서 유래하였느냐는 물음을 던질 수밖에 없었다.
사실 악의 기원이란 문제는 이미 13살의 소년 시절에도 내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가슴속에 반은 어린이를, 방능 신을” 품고 있을 나이에 나는 이 문제에 나의 최초의 문학적인 유치한 장난이라고 할 수 있는 첫 번째 철학적 습작을 바쳤다.
당현한 일이었지만 당시에 나는 신에게 영예를 돌려 신을 악의 아버지호 간주하는 방식으로 그 문제를 해결했다.
나의 ’선천성‘ 때문에 그렇게 했던 것일까?
저 새롭고 부도덕한, 혹은 적어도 비도덕가적인 ’선청성‘과 그 ’선천성’에서 발하는 아아! 너무나 반 칸트적이고 너무나 수수께끼 같은 ‘정언명령’ 때문에 그렇게 했을까?
그 동안에 나는 이 정언명령에 갈수록 더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
아니 귀를 기울이는 것만이 아니었다.
다행히도 나는 일찍이 신학적인 편견을 도덕적 편견 편견에서 분리하는 것을 배웠으며, 또한 악의 기원을 더는 이 세계의 배후에서 찾지 않게 되었다.
내가 심리학적 문제 일반에 관한 감식력을 타고난데다 어느 정도의 역사학적, 문헌학적인 훈련을 쌓게 되면서 나의 문제는 다른 문제로 변형되었다.
인간은 어떤 조건에서 선과 악이란 가치판단을 고안해냈는가?
그리고 그러한 가치판단들 자체는 어떠한 가치를 갖고 있는가?
그것들은 이제까지 인간의 번영을 저지해왔는가 아니면 촉진해왔는가?
그러한 가치판단들은 삶의 위기와 빈곤 그리고 퇴화의 징후인가?
아니면 반대로 그것들에는 삶의 충만함과 힘, 삶의 의지와 용기, 삶에 대한 자신감과 미래가 나타나 있는가?
이 문제에 대해서 나는 내 나름대로 여러 가지 해답을 발견하기도 했고, 또한 감히 여러 가지 해답을 고안하기도 했다.
나는 여러 시대와 여러 민족 그리고 개인들의 등급을 구별했고, 나의 문제를 세분화하여 전개해보았다.
여러 해답으로부터 새로운 물음과 탐구, 추측, 개연성이 나타났고, 마침내 나는 나 자신의 나라와 땅을 갖게 되었으며, 침묵 속에서 성장해가는 꽃이 만발한 세계를, 즉 아무도 알아채지 못하는 은밀한 정원을 갖게 되었다.
오오, 우리 인식하는 자는 얼마나 행복할 것인가!
다만 오래도록 침묵을 지킬 줄만 안다면!